Happy Easter.

부활절이다.

아주아주 홀리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순절동안 금요일 금식금육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한 지키며 살았고

고백성사도 두 번이나(왜 두 번이나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여튼) 했다.


최근 몇 년동안 처음 있는 일이지만.... 기쁘다.

늘 사순시기를 엉망으로 보냈었던지 부활절을 맞아도 남의 잔치에 잘못 초대받은 것 처럼 찝찝함이 남아 있었는데

부활절에 기쁘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 사실 더욱 기쁘다.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의 기복이 없는 날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아까 성당을 나오며 문득 그런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아주 잠깐.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결혼을 하고 사랑을 해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몇년이 흐른다면

그때쯤은 시소 중간에 서있는 것처럼 불안정한 감정도 사라질까?


몇년전 수도원에서 맞이했던 부활절 전날, 달걀에 그림을 그려넣고 있으려니 어느새 12시가 넘었고,

외국인 신부님들과 "Happy Easter, Father", "Happy Easter, Brother"하며 서로 포옹해주던 기억이 새롭다.





사랑은 늘 그렇게 간단한 것을.





acro™

by acro™ | 2008/03/23 23:21 | 이런저런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너무 달아서 질려버린 블루베리파이 (My blueberry nights)

 

만일 당신이 만난 그 사람의 영화에 관한 취향을 알아보고싶다면 간단한 질문이 있다. 그냥 왕가위 영화 중에서 어느 영화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라고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오우삼은 <열혈남아>가 심금을 울린다고 대답했다. 지아장커는 <아비정전>에서 새로운 화어권 영화를 보았다고 대답했다. 장이모는 <동사서독>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대답했다. 서극은 홍콩영화에 <중경삼림> '이전과 이후' 가 있다고 대답했다. 리앙은 <타락천사>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대답했다. 차이밍량은 한참을 망설인 다음 <해피투게더>라고 대답했다. 허우샤오시엔은 망설이지 않고 <화양연화> 라고 대답했다. ( 이 대답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다른 대답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서 누가 맞고 누가 틀린것은 아니다. 그건 취향의 문제다.


정성일 - 씨네21 No.499 中


씨네21에 기고한 이 정성일의 글은 너무나 아귀가 맞아떨어져서 마치 작위적으로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왕가위의 영화가 가지는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왕가위의 영화는 늘 그랬다. 항상 여기까지가 극단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밀어붙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액션이면서 액션이 아니고 멜로이면서도 여느 멜로와 달랐다. 그것은 모호함을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장르영화의 자장을 벗어나 자신만의 영화미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철저하게 영화적이라는 점에서 '시네아티스트'라는 명칭이 왕가위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왕가위는 사건이나 대사보다 이미지와 영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도록 효과적이다. 그가 자주 쓰는 핸드핼드와 스텝프린팅을 흉내낸 영화는 많지만 누구도 왕가위와 같은 울림을 주지 못했다. 남녀의 미묘한 감정을 잡아내려 했던 영화는 많지만 그 중 어떤 영화는 '미안하지만, 이건 왕가위가 훨씬 잘한다'라는 노골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내가 자주 언급했던 화양연화의 골목길과 계단을 보자. 물론 60년대 상하이에는 그렇게 골목도 길었을 것이고 엘레베이터가 없어 걸어올라 다녀야했던 아파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과 공간의 길이가 그렇게 길었을까? 누군가 나의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도 내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고 서로에 대해 끌리고 있다. 이 때 우리가 걷는 거리와 시간은 한없이 길게 느껴진다. 둘 사이를 흐르는 그 팽팽한 에로틱한 긴장감이 그렇게 늘려놓은 것이다. 왕가위의 영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가슴 절절한 독백도 없다. 하지만 손에 쥔 담배의 여린 떨림만으로도 차우의 슬픔은 고스란히 관객의 것으로 들어오고, 잠시 품에서 쉬는 듯 했던 발 없는 새는 다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없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의 첫번째 영어권 영화이다. 원래 니콜 키드만과 함께 하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무산된 후 왕가위는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네 단락으로 나눠진다. 사랑을 찾아 맨체스터에서 온 청년은 그 사랑을 열쇠에 봉인한채 뉴욕에서 한 바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을 잃고 찾아온 여자는 그에게서 팔리지 않는 블루베리 파이를 대접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떠난다. 어긋한 이혼남녀의 사랑을 바라보고, 죽음 후에야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던 도박사를 만나며 뉴욕에서 라스베가스까지 떠오는 동안 남자는 매일밤 블루베리 파이를 만들며 그녀를 기다린다. 사람을 믿지 않는 법을 배우려했지만 끝내 실패했던 그 여자가 돌아오기를.


칸에서 호평보다 혹평을 더 많이 받았다는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줄여서 편집했다지만 확실히 이전 왕가위의 작품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왕가위의 특징인 현란한 이미지는 크리스토퍼 도일이 없어도 아직 건재하고 노라 존스의 감미로운 보컬과 라이 쿠퍼의 블루스 기타는 여전히 세련되만, 이 모든 것이 캐릭터와 따로 노는 듯 동화를 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름답다. 사흘동안 1000번이 넘는 키스 끝에 찍었다는 라스트 신은 블루베리 파이 만큼이나 달콤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장면만 모아 놓는다고 영화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치 왕가위의 영화를 흉내낸 것만 같은 작위로움이 영화 내내 느껴진다. 노라 존스야 그렇다치더라도(왕가위는 절대 연기수업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캐스팅했다고 한다.) 레이첼 바이즈, 나탈리 포트만처럼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들의 연기마저도 (어느 영화평을 빌리자면) '캐릭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를 보는 것'같이 느껴지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엉뚱한 데서 헤멨거나 너무 감상적이거나'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졸작이나 태작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조금 이른 것 같다. 어쨌거나 여전히 왕가위의 영화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하긴 뭐 다 개인적인 얘기다) 평을 해보자.
누차 말하지만, 사람의 지각과 인식체계는 너무나 가변적이다. 남들의 졸작도 나에게는 걸작이듯, 오늘 눈물을 흘리며 보았던 불후의 명작이 내일은 유치찬란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이건 객관적인 별점과 나만의 걸작리스트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이격이 아니다. 머리속으로는 그저그렇다 싶으면서도 눈은 한 장면이라도 놓칠새라 몰입하는 영화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머리속에 남아있는 중경삼림의 이미지는 남들이 다 감탄하는 현란한 카메라 워크가 아니라 첫장면, 숨이 멎을 것 같았던 임청하의 클로즈업된 얼굴인 것 처럼.
솔직히 고백하겠다. 마이블루베리나이츠가 아무리 중간에 갑자기 이무기와 고질라가 자유의 여신상이 망가지는 격투를 벌이는 와중에 피어난 사랑으로 낳은 괴물이 한반도대운하에 등장하는 막장 영화였더라도 나는 남들보다 별 한 개 반쯤은 더 줄 용의가 있다. 그건 노라 존스의 쌍꺼풀 때문이다. 왜 하필 쌍꺼플이냐고?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그저 그 쌍꺼풀이 한없이 예뻤는걸.


 

말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뭐 어쩌겠냐.. 원래 사랑이 그런 것을...


acro™

by acro™ | 2008/03/18 15:47 | 책, 영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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