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단상


scene 1. 양재천

토요일, 양재천을 산책했다.
회사에서부터 탄천을 통해서 천천히 쉬엄쉬엄 걸어 양재역까지 나아갔다. 저녁부터 비가 온다던 날씨는 바람은 좀 불었지만 포근했다. 중간중간 사진도 찍었지만, 원색이 아직 모자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한 번 쉬었기는 했지만 혼자 걸으려니 조금은 심심했고 그래서인지 더 피곤함이 느껴졌다. 아이러니컬하지만 정작 내가 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집 근처 남쪽을 바라보고 심어져있던 개나리의 꽃망울이었다. 그리고, 남의 강아지나 남의 집 애기들을 귀여워해주는 것도 이젠 조금 지겹다.



scene 2. 단식

원래 상가집에 가면 술 마시고 고스톱 쳐줘야하는게 예의겠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돌아가신만큼 토요일은 배고픔을 참으며 단식을 했다. 졸려도 배고파서 잠이 안오는, 나로서는 기이한 현상을 겪으며 12시가 넘자마자 크램차우더 스프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셨다. 빈 속에 마시는 맥주는 감각중추에 직접 주사한 듯 바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게 잠이 들었다. 일요일 오전에 잠시 일어나 아점을 먹고 다시 잠이 들어 깨어나니 오후 3시였다. 뭐 한 것도 없는데 주말이 다 지나가버렸다는 자괴감보다 늘 그랬던 것 같은 기시감과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던 것에 대해, 누군가가 비난한다면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다.



scene 3. 광화문

서울시내 153개나 있는 성당이지만 그중에서도 멀고먼 광화문까지 갔던 것은 교보문고에 책을 좀 보러 갈 일이 있어서라고 하고 싶지만 정작 교보문고에는 시간이 촉박해 정문만 구경했고, 결국 송백부대찌개에서 부대찌개를 먹기위해 광화문을 간 격이 되어버렸다. 가회동 성당만큼이나 작지만, 가회동 성당보다는 제대로된 성가대가 있는 세종로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다시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대찌개를 먹고는, 나무사이로에 가서 커피와 치즈케익을 먹었다. 얼마전에 쓴 꽤 그럴듯한 픽션의 모티브를 제공해준 나무사이로는 여전히 건재했고, 여전히 맛있는 커피를 제공했으며, 그때랑은 달리 모든 케이크가 아직 다 팔리지 않고 남아있었다. 치즈케익의 맛은 여전했고, 처음 맛보는 초콜렛케익은 진하고 촉촉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심이 되는 맛이었다. 당근케익도 먹고 싶었지만 다음기회를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당근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토끼띠치고는 이상한 식성을 가졌지만, 뱀띠임에도 온몸이 털로 덮혀있는 내 후배를 생각하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scene 4. 충동구매

순전히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삿포로행 비행기표를 예약한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분은 늘 나와 함께 계시지만, 정작 그분이 나를 움직이실 때엔 나는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한다. 그분이 가신 뒷자리에 홀로 서 있는 내 모습만 남겨져 있을을 따름이다. 순전히 맥주가 마시고 싶어서 삿포로를 간다니 하이트맥주 사장이 통탄할 노릇이라는 나의 한탄에, 아는 형님은 빵 사먹으러 주말에 파리갔다온 선배 얘기를 해주며 위로해주었다. 스스로를 가여워하기도 벅찬 존재들이 서로를 위로해주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땡처리전문 할인항공권 사이트에서는 동경, 오사카, 후쿠오카는 물론이고 심지어 오키나와행 할인항공권도 저렴하게 나와있었지만, 정작 훗카이도로 가는 표는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다는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scene 5. 추어탕

며칠동안 골골 앓으시던 어머니가 안되어보여 장어구이라도 사드리려 했더니, 추어탕만으로 충분하다며 점심때 함께 가기로 하였다. 허나 내가 일어났을땐 이미 어머니 혼자 드시고 불효막심 아들을 위해 포장도 한 그릇 해오신 후였다. 덕분에 어머니께 곰국이라도 해드시라고 5만원을 드리고 왔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어머니를 강요하여 누나보다 낫다는 진술을 얻어낼 수 있었기에 그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예상대로 누나는 길길이 뛰며 한 집에 사는 장점을 악용했다고 분노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는가. 사실 어머니는 늘 나를 더 좋아했다(고 믿는다.)







하루하루를 더 살아갈수록 연륜과 지혜와 현명함이 쌓이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신용카드 전표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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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ro™ | 2008/03/24 15:30 | 이런저런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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