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용서, 삶에 대한 서글픈 보고서. 밀양

전도연의 수상소식따윈 문제가 아니었다.
전도연이 수상했든, 송강호가 수상했든, 혹은 이창동 감독이 감독상을 탔건 아니면 작품자체가 황금종려상을 탔건, 아니 이 모든 것이 좌절되고 맨손으로 돌아왔을지라도 나는 밀양을 볼 생각이었으니까. 예상보다 빨리 매진된 예매석, 역시나 칸에서의 수상소식 덕분인지, 평소 같았으면 영화관에 오지 않을 것 같은 중년부부의 모습들도 보인다. 어쨌거나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영화를 보고난 지금, 나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평론가 정성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역할은 영화를 잠시 멈춰어놓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무릇 모든 장르의 예술이 그러하다. 이 정신없는 세상을, 갈수록 빨라지고 혼탁해지고 현란해지는 이 세상을, 잠시 세워놓고 바라보게 하는 것. 그래서 나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멈추어 생각했으면 좋겠다.
배우들의 소름끼치게하는 연기와 핸드헬드의 카메라가 마치 너를 위해 있었다는 듯이 어우러진 이 무시무시한 영화를.


이창동감독은 소설가 출신답게 구조와 서사에 강하다. 그의 영화 플롯들은 치밀하게 이를데 없어 못 하나 들어가지 않는 단단한 벽을 보는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쉽지않은 구조의 박하사탕을 그토록 설득력있고 치밀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의 걸음이 묵직하고 불편한 진실, 내면 깊숙히 감추어진 삶의 부조리들을 향해 뚜벅뚜벅 향할때 관객들은 힘겨워진다. 자연 불편해진다. 그의 시선은 건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다. 통렬하지도 않지만 대책없는 낭만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잘난체 하지도 않지만 친절하지도 않다. 그의 앞선 세 영화가 그러했고 네번째 영화인 밀양에서 또한 그러하다.


밀양은 유괴를 다루지만 그 폭력성을 성토하지 않는다. 유괴와 아이의 죽음은 분명 신애의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 과정은 모두 생략되었다. 유괴라는 사건의 물질성(예컨대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범인의 목소리, 아이의 시체)은 모조리 건너띈다. 감독은 처음부터 관객을 신애에게 감정이입시키지 않으려는 것 같다. 유괴를 소재로 다루는 영화에서 관객을 울리기란 어렵지 않다. 어미의 눈물, 아이의 울먹이는 목소리, 천진했던 시절의 사진 그리고 끔찍한 주검이면 쉽사리 관객은 부모에게 동질화되어 범인에게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밀양에서는 다르다. 정작 밀양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 이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애는 아이의 죽음 이후 종교에 빠져들게 된다. 다른 관객들은 개신교 집회 또는 부흥회의 남다른 모습(그것은 종교가 없는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 남다른 모습이다)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거부감을 주기도 했을테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낯설지 않았다. 카톨릭 신자로서 그 모습은 예전의 나의 모습이기도 했었으니까. 물론 그때 내가 받은 상처는 신애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될 작은 것이었지만 누구나 제 십자가를 지고 사는 법, 구원의 한자락을 잡기위해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심정은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을 터이다. 그리고 신애는 외견 그 상처를 이겨낸다. 마치 그녀 말대로 기적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신애의 교회 목사의 말처럼, 하느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신애는 자신의 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는 이미 용서를 받아버렸다. 역시 같은 하느님에게서. 용서란 무엇인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신의 이름으로 용서받았다는 것과 인간에게서 용서받았다는 것은 무엇이며 신의 이름으로 용서한다는 것과 인간으로서 용서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신애는 인간적으로 용서할 수 없지만 범인은 이미 인간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혹은 그가 용서를 구한다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것이다) 그는 사회적 처벌(교도소 복역)과 신의 처벌(그의 말대로 수없이 괴로워하던 죄인의 삶)을 이미 받았거나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처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신애는 그가 잡혀오던 순간, 그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던지지 못하고 옆으로 비켜서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신애가 할 수 있는 용서란 어떤 것인가. 진정한 치유는 용서를 통해 이루어진다지만 오히려 진정한 용서는 어느정도의 치유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신을 통해 치유를 받지도 용서해줄 힘도 얻지 못한 신애는 결국 신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을 시작한다. 노골적인 반항, 위악. 그러나 그것만으로 치유될 수 없는 신애의 상처. 결국 신애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자살. 결국엔 자살하고야하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에서 신애는 거리로 나가 '살려달라'고 말한다. 겁나서? 살고싶어? 아니, 자살이란 본래 죽음을 통해서 삶을 시위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살하는 사람이 세상과 신에게 말을 거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퇴원하던 날, 신애가 이웃집 가게 주인과 나누던 대화와 웃음(나는 이 부분이 전도연 연기의 가장 뛰어난 장면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속에서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신, 신애는 마당에 거울을 세워두고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읽고 이창동 감독은 즉각적으로 광주와 5.18을 떠올렸다고 한다. 용서를 구할 생각은 커녕 잘못했다는 자각조차 없는 학살자들을 앞에서 피해자들이 느껴야하는 용서와 치유의 딜레마를, 그리고 삶과 세상의 부조리를.
영화에서 감독은 그것을 좀더 미시적 차원으로 끌어내렸지만 여전히 본질적으로 틀리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작한 영화는 마당 한 켠에 비추는 햇살을 보여주며 끝난다. 밀양(密陽). 은밀한 햇빛. secret sunshine. 지독한 삶의 어둠과 고통 속을 버티고버텨 얻어낸 한 줌의 햇살. 흐린 듯 개인 듯 살며시 드는 빛.
그것만으로 치유와 용서가 가능할 수 없으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없다면 버텨나갈 수 없는 한줌의 숨겨진 빛.




"밀양은 어떤 곳이죠?"
"똑같아예. 딴 데 하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예"







정말 누구에게도 그 빛은 존재하는 걸까?

acro™
by acro™ | 2007/05/31 01:54 | 책, 영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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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유레카 at 2007/06/01 09:04
숨겨진 햇볕이 용서를 의미 하는지요^^??
Commented by 키즈리턴 at 2007/06/27 13:25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밀양 보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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